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한산도대첩을 그린 민족 기록화 (전쟁기념관)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 발발
1598년까지 이어진 7년간의 전쟁으로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당시 조선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의견이 묵살되는등 전혀 전쟁의 준비가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날로 심해져갔다.
조선의 초기 사대교린정책은 명을 숭상하고 왜나 오랑캐를 배척하는 정책에 의해서 왜를 교린하고 있었는데,
한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정복의 야망으로 있던 때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집권세력이덨던 동인의 김성일에 의해 전쟁의 기미를 느낄수 없다는 견해로 하여 일본의 전쟁의 뜻을 간파하지 못했다.
집권세력으로서 백성의 동요가 두려웠던 나머지 모두들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
건국후 200여년간 평화가 유지되었던 까닭에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대비도 없었으며 군기또한 굉장히 해이했던 것으로보니다.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오히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이 선조에게 명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비를 정비하면서 전쟁 준비를 서두르자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탄핵까지 받을 뻔하였다.
1592년 4월 13일(음력) 20만 병사로 조선을 침공한 일본.
4월 14일 정발의 부산진성 함락
4월 15일 송상현의 동래성을 함락
4월 25일 상주 함락
4월 28일 충주 탄금대를 배수에 진을 친 신립의 패배.
세 갈래 길로 북진 조선을 함락시켜가던 일본
1.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2.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3.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였다.
5월 2일 개전 20일만에 한양을 점령.
5월 16일 유해령전투 부원수 신각이 승리로 이끈 조선 육군의 최초의 승리
5월 18일 임진강 함락
5월 24일 정암진전투 곽재우등 조선 의병이 최초로 왜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6월 13일 평양 함락
이미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백성을 버렸으며 몽진에 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화가난 백성이 노비문서를 불태우는 등 궁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왜군 42척을 격침. 이순신의 첫 승전이면서 전쟁 이후 조선수군의 첫 승리.
5월 8일 적진포해전 왜선 5척 왜군 2840명 전사
5월 29일 사천에서 왜군 13척을 전멸. 거북선을 처음으로 투입.
6월 2일 당포해전 왜선 21척 격침. 왜군 2820명 전사
6월 5일 당항포 왜선 26척 왜군 2720명 전사
7월 8일 . 한산도대첩. 이순신 3대 대첩(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도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성대첩)중 하나로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학익진 전법으로 왜선 59척을 격침 나포. 4~5000왜병 전사.
왜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으며 왜수군의 주력을 거의 괴멸시킨 대첩이다.
이 한산도대첩의 승리로하여 조선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거의 장악. 임진왜란의 판도를 달리하게 하는 전투였다.
7월 10일 경남 진해 안골포에서 왜선 42척 모두 격침. 왜군 3960명 전사
9월 1일 부산포 왜선 128척 왜군 5000여명 사상 한산도대첩후 잠잠하던 해전이 부산포승리이후 완전 제해권을 장악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H.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전국 각지의 의병 봉기
김면 경상도 거창 고령
조헌 충청도 옥천
곽재우 경상도 의령
고경명 전라도 장흥
김천일 호남에서 거병
정문부 함경도
휴정 유정 묘향산 승병
등등
7월 8일 권율 황진의 1000여 조선군이 2000여 왜군과 맞서 승리.
10월 4일~10일 진주성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 김시민의 3800여 관군과 백성이 3만 왜군을 물리침.
김시민을 포함 1000여명 사상 일본군 10300여명 사상.
1593년 2월 13일 행주대첩(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 2800여 병사가 3만 왜군을 물리침
조선군 130여명 사상. 왜군 15000여명 전사 9000여명 중상
1597년 7월 4일 칠천량 해전 원균의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00여선 침몰 수군 20000여명 궤멸.
원균의 사망. 배설이 12척을 끌로 도주 정유재란의 빌미가 됨
8월 20일 정유재란 발발. 명나라와 왜와의 임진왜란 종결을 위한 강화가 결렬되자 왜가 재 침공해 옴
9월 16일 명량해전 13척의 전함으로 왜선 31척 완파 92척 판파. 칠천량해전 당시 역모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있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되어 전쟁에 투입. 선조가 칠천량 패전 이후 조선수군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여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다.
1598년 7월 19일 절이도해전 전라도 고흥 절이도에서 왜선 50여척 왜군 16000여명 사망
12월 16일 노량해전 이순신이 전사한 전투. 왜선 200여척 침몰. 100여척 나포. 150여척 파손.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잔병들의 퇴각, 노량해전이 끝나고 정유재란도 끝이 난다.
그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난다.
7년간의 전쟁 이후 100만명 사망, 경작지의 약 70% 유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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