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youtube.com/watch?v=KA88qV3s14E KBS징비록 다큐영상 캡쳐
류성룡의 일대기
1542년에 태어난 유성룡은 이황의 아래에서 수학을 하였다.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년뒤에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 후 승승장구하여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 없이 승진해 나갔다.
1589년 정여립의 난에 서인인 정철의 사주로 동인편에 있던 류성룡은 역모에 역일수도 있었으나, 선조의 신임으로 별탈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이 정여립의 난으로 하여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려지게 되는데 서인 정철의 처벌을 두고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는 말자는 온건파로 갈려지게 된 것이다.
내분에 휩싸인 동인은 이렇게 이산해 정인홍은 북인, 류성룡 우성진 등은 남인으로 갈려지게 된다.
1591년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있을때 선조의 명장 천거 요청에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원균을 경상우수사에 배치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류성룡은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순신이 역모로 몰렸을때 유일하게 그를 옹호하고 변호했으며
1598년 영의정이었던 그는 북인에 의해 탄핵을 당하여 낙향, 영남 남인을 형성하여 학문에 몰두하게된다.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왜란을 겪은 후 류성룡은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된다. 이책의 내용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임금과 조정에 대한 원망 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은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 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징비록》은 〈징비록〉 상·하의 두 권과 〈녹후잡기〉, 〈근포록〉(芹曝錄)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 전의 조선과 일본의 상황과 관계,
일본의 침략에 따른 조선 사회의 붕괴와 의병 봉기,
이순신의 승전, 전선 교착,
강화 교섭과 정유재란,
수군의 최후 공격, 일본군의 패퇴
등이 편년체로 기록되어 있다.
근포록은 저자가 올린 차(箚) 및 계사(啓辭)를 모은 것이고, 진사록은 임진년(1592년)으로부터 계사년(1593년)까지 종군하는 동안의 장계를 수록하고 있다.
군문등록은 1595년(선조 28)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저자가 도체찰사로 재임 중의 문이류(文移類)를 모은 것으로 여기에 자서(自敍)와 자발(自跋)이 들어 있다. 이 책의 처음 간행은 1633년(인조 11) 저자의 아들 류진이 《서애집(西厓集)》을 간행, 이후 원본의 체재를 갖추었다는 그 전본도 간행되었다. 1695년 (숙종 21년 : 일본 겐로쿠 8년) 일본 교토(京都) 야마토야에서 중간하였으며, 1712년(숙종 38)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 수출을 엄금할 것을 명령한 일이 있다. - 위키백과
류성룡은 ≪징비록≫에 ‘우리 국가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남해 해전에서의 승리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류성룡의 여러 업적
류성룡은 김성일의 조선통신사 파견 이후에 그의 말에서 정확한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전란에 대비한다.
일본의 침공이 예상된다며 조정이 만류를 무릅쓰고 명에 알리는가하며, 그 동안의 조선의 방어체제인 방승제략이 아닌 진관법을 주장한다.
방승제략은 적이 침공해오면 흩어져 있던 군사를 한군데 모아서 한꺼번에 적을 섬멸한다는 것이고 여기서 패할시는 더 이상의 군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관체제는 중요한 요지 요지에 진을 쳐서 방어를 하자는 것이다.
끝내 채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권율 이순신 을 천거 하는 등 인재을 등용하였다.
특히 이순신은 여섯품계를 승진시켜 전라좌수사에 앉힌다.
그 배경에는 이순신의 형인 요신과 친구 사이였고 어린때 부터 그의 됨됨이를 알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역적으로 몰릴때에는 그를 믿고 구명에 나섰던 인물이다.
선조의 몽진이 압록강을 넘을 즈음에 그 또한 막아선 이가 바로 류성룡이다.
그리한다면 더 이상의 조선의 왕이 아니다...
류성룡은 군사개혁도 단행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직업군인양성기관인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이다.
또한 양반도 병역의무을 지게 함으로써 나라를 구하는데 양반 상놈이 어디있는가라며 속오군을 만들었다.
양반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겠는가.
1592년 12월 명나라의 군대가 지원을 오면서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을 무찌르며 남하, 평양을 수복, 계속 남하를 하려하였으나 임진강이 가로 막고 있었다.
여기서 류성룡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군사를 시켜 칡넝쿨로 새끼로 꼬고 밧줄을 만들게 하고 강 양쪽에 베틀 같은 구조물을 만들어 잡아 당김으로써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이로써 군사, 군수품, 대포등 을 안전하게 옮길수가 있었다.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 · 거북선 · 한글 · 부교를 꼽았는데, 부교가 바로 유성룡이 만든 임진강 부교다.
징비록에 의하면
나는 우봉 현령 이희원에게 고을 사람 몇백 명을 데리고 밤새워 먼저 가서 칡덩굴을 거두어 임진강 어귀에 모이라고 약조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임진당으로 달려가서 내려다보니, 날씨가 따뜻해서 강 가운데의 얼음이 내려앉아 물이 흘렀기 때문에 강 너비가 매우 넓었다. 경기 수사 이빈과 장단 부사 한덕원 등이 모두 도착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이빈에게 태만하여 준비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하여 장(杖)을 때렸다. 그리고 우봉 사람들을 불러 칡을 수납하여 모두 앞에다 쌓았으나,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였다.
새끼를 꼬아 강을 가로지를 만한 동아줄 15개를 마련했다. 또 강 남쪽과 북쪽 두 언덕에 땅을 파 서로 마주보게 두 기둥을 세워 움직이지 않게 하고, 나무 하나를 눕혀 기둥 안쪽에 놓아 붙들어 매서 베틀 모양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다 동아줄을 팽팽하게 늘여 강 건너 기둥의 가로지른 나무에 매어 날줄을 만들었다. 강 너비가 너무 넓어서 동아줄 중간이 반쯤 물에 잠겨 올라오지 않으니, 모두 “이는 사람 힘만 헛되게 없앨 뿐 어떻게 다리가 되겠는가” 라고 말했다.
나는 강가에 있는 군사 천여 명에게 각각 3, 4척 되는 짧은 통나무를 가지고 동아줄을 몇 번 감아 돌려 저 끝과 이 끝이 팽팽하게 조이게 하였다. 그러자 물에 잠긴 동아줄이 비로소 서면서 통나무가 서로 잇댄 것이 빗살처럼 강 위에 걸터앉아 활 모양 비슷한 둥근다리 하나가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한 뒤에 그 위에다 가는 버드나무 · 싸리 · 갈대를 섞어서 펴고 흙을 덮었다.
명군이 이것을 보고 매우 기쁘게 여겨 다리 위로 말을 달려 지나갔다. 먼저 화포와 군기를 모두 이 다리로 운반하였다.
http://blog.daum.net/dandakhan/16570499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고기를 먹으면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선조실록 1594년 1월 17일
극도의 기근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류성룡의 경제살리기가 펼쳐진다.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던 압록강일대에 자유무역지대 설치하고
무명이나 소금 수출, 식량 수입하는 것을 허용하며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한글로 된 선조의 교지.
거기에는
"왜적의 머리를 베어오면 천민의 신분을 면하겠노라"
는 글이 적혔있었다.
바로 면천법이다.
천민들이 의병으로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또한 양민으로 천민의 신분을 벗어 주겠다는 의병 모병에도 앞장섰다.
류성룡은 세제개혁도 단행했는데 불합리한 방납(조선 시대,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을 나라에 대신 바치고 대가로 백성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아 내던 일)을 폐지하고, 가구별징세를 토지별 징세로 바꿈으로써 양반이나 관료 등으로부터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관철시킴으로써 현 박근혜정부도 하지 못하는
부자증세, 서민감세를 제대로 정착시켜서 나중에 대동법으로 이어지게 했다.
또한 둔전을 두어서 평민이나 군사들이 땅을 개간하여 경작을 할수 있도록 했다.
유성룡의 관운에는 먹구름이 끼고 있었습니다. 선조가 그를 견제하며 정적으로 여긴 탓입니다. 그럼에도 유성룡은 선조를 적대시하지 않고 속 좁은 선조에게 양보하면서도 실리는 챙겨내는 재능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선조가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문제를 결정해 주기를 바라자 세자에게 아예 양위하겠다며 몽니를 부렸지만 선조를 달래 양위 소동을 중지시킨 것도 그가 한 일입니다.
대동법 실시와 천민, 노비를 양민으로 바꿔주고 세금과 병역 의무를 지게 하는 제도 역시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망설이는 선조를 설득해 시행했습니다. 콧대 높은 명나라 사신들 앞에서 주눅이 든 선조를 지키고 그의 위엄을 살려준 것도, 심지어 명나라에 파견하는 사신이나 외교 문서의 작성에서 선조를 세우고 중요한 전술전략을 제시한 것도 유성룡이었습니다. 이처럼 유성룡은 전란의 위기 현장에서 선조와 줄다리기를 하며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군주의 재목이 부족해 지혜로운 참모를 끝까지 견인하지 못한 것이 선조에게나 유성룡에게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 군주에 대한 불평, 불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손들이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려고 전란의 자초지종을《징비록》으로 남겼고 그의 경륜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데 전력했습니다.
유성룡은 이처럼 어떤 환경의 어려움이 닥쳐와도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냄으로써‘CEO를 보좌해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 가야 하는 이 시대의 스텝들이 본받아야 할 진정한 참모상을 보여준 우리 역사의 참 영웅이자 리더였습니다.
http://www.insightofgscaltex.com/?p=38395
장승대 세명대 교수는 지금 시대에 문무겸전의 리더십을 발휘한 서애 류성룡의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류성룡은 자강 자주 외교를 주창하며,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신무기를 도입하는가 하면 인재를 등용할 때도 신분을 초월해 전문성과 실무능력을 중시했습니다. 유교의 선비정신을 유지하되 경제실용을 앞세운 거지요. 서애 류성룡이 임란 극복의 최고 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겸비한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한 덕분입니다.”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6
유성룡 선생은 민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과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경세가답게 ‘위기 극복의 최선책은 민심을 얻는데 있으며, 민심 획득의 핵심은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제도와 관습의 타파에 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실천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면천법(免賤法)을 제정해서 천민도 전공을 세우면 양인(良人)은 물론 벼슬까지 얻을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또 조세부과의 기준을 호(戶)에서 농지소유의 규모로 바꾸는 작미법(作米法)의 제정을 통해 농민의 세 부담을 크게 줄여 주었다. 게다가 양반들도 군역을 맡도록 하는 병무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군대가 속오군(束伍軍)이다.
조선 민초들은 유성룡 선생의 잇따른 개혁조치에 대해 환호했다. 개전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빼앗겼던 조선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마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반된 민심을 하나로 결집시키는데 성공했던 그의 뛰어난 경륜과 지략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가자 선조를 비롯한 서인과 북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서인과 북인들은 신분제 질서를 개혁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에 메스를 들이댄 유성룡 선생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선조 역시 전쟁영웅으로서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그의 존재가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그 결과는 유성룡 선생의 파직으로 이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했다.
그 이후 선조는 인간적인 미안함 때문인지 여러 차례 유성룡 선생을 불렀지만, 그는 조정의 부름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이 경험한 임진왜란의 참상과 후대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사항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자신의 남은 여생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징비록≫이다. ≪징비록≫은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서 거기에는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유성룡 선생의 불타는 신념, 냉철한 확집, 고결한 투쟁, 눈물겨운 정성이 가득 담겨져 있다.
그러나 후손들에 대한 유성룡 선생의 소망과 기대는 413년이 지난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정당과 정치리더들은 안일한 붕당구조의 틀 속에서 기득권고수와 이전투구만을 일삼다가 정치권의 대공황이라는 혼돈의 블랙홀에 빠져들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이익과 민생문제 해결에 소홀했던 탓이라고 생각된다. 카오스로 점철된 오늘, 선각자 유성룡 선생의 탁월한 리더십과 나라사랑 정신이 애타게 그리운 것도 그 때문이다.
http://www.expres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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