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이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던 사건.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사건 이후 정국은 대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맡아서 정국을 수습하는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 개혁이 진행되고 정치 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 합동 수사 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1979년 12월 12일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하여 사후 승인을 받았다.
이들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계기로 국가 권력을 탈취함으로써 긴 쿠데타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였으며 5.16 이후 또 한번의 군사쿠데타였다.
[사진설명: 12.12 군사쿠데타 다음날 12월 13일 당시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지휘관 전원을 모두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난 이후 찍은 사진.....
맨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최세창(3공수여단장)박희도(1공수여단장)노태우(9사단장)전두환(보안사령관)차규헌
(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1군단장)김윤호(보병학교장)정호용(50사단장) 등등
둘째줄 맨 왼쪽 박준병(20사단장) 오른쪽에서 두번째 장세동(수경사 30경비단장)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 허화평(보안사령관 비서실장)허삼수(인사처장)김진영(수경사 33경비단장]
[12.12사태 주역들이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
허삼수, 우경윤, 이희성, 정호용, 노태우, 허화평, 장세동, 황영시,김복동, 유학성, 유병현, 박준병,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김진영 등 신군부세력이 육군본부·국방부·중앙청·경복궁 등 핵심 거점을 차례로 점령하고,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제하에 두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에 모여있던 윤성민 참모차장과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문홍구 합동참모본부장 등 육군본부측 장성들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인 1980년 1월 20일자로 정승화 추종세력인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장태완 등을 모두 예편시키고 정승화 참모총장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들과는 달리 십이십이사태를 주도했던 신군부세력은 대부분 승승장구하여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브리태니커)
이렇게 이들의 쿠데타가 이루어졌으며,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체육관 선거를 통하여 스스로 대통령직에 앉았으며 7년을 집권하게 된다.
이 당시 김대중 전대통령은 내란 음모죄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신군부세력인 노태우가 연이어 권력을 이양받아 5년을 집권, 그 이후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은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다음 정권인 김영삼 정권에 의하여 12.12사태가 재조명 되었으며,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구속되어 사법적 심판을 받았다.
언제 다시 한번 얘기 할때가 있겠지만 당시 김영삼 정권은 금융실명제로 인하여 정치자금이 탄로 나게 되면 노태우의 수천억 비자금이 탄로 나게 되고 그리되면 그 불똥이 본인에게로 튄다는 판단하에 전혀 다른 사안인 12.12사태와 5.18계엄령 등으로 사건을 덮는 형식이었다.
즉, 국민의 정치 자금에 관한 관심을 딴데로 돌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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